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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트릭스터의 이빨- 나규환 형상조각의 미학적 테제

김종길 미술평론가

2020.11


“생존의 각축장인 현실을 바라보는 작가의 태도는 흥분된 것이 아니라 차라리 냉정하며, 그 냉정함이 해학과 만나 촌철살인의 힘을 고조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그에게 있어서 리얼리즘이란 현실의 정직한 반영이란 차원을 뛰어넘어 현실보다 더 리얼한 현실의 제시와 맞닿게 된다. 거기에 트릭스터의 이빨이 있다. 구본주의 실체는 그래서 빨갛고 숭엄한 폭소의 그늘에서 ‘오리무중’으로 떠들어 대는 트릭스터다. ‘빨간 피터의 고백’은 여기에 있다!”

- 김종길, 「구본주의 리얼리즘 조각론-구본주 1967-2003」(2014) 의 마지막 문장


조각가 나규환이 구본주예술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트릭스터의 이빨’이었다. 구본주는 한국사회의 자본주의가 속도주의로 빨려 들어갈 때 ‘빨간 피터’의 폭소와 이빨을 드러내며 현실을 풍자했었다. 그의 형상조각은 그래서 시대의 살아있는 벽화였고, 뜨거운 현장성의 걸개였으며, 과거(역사)와 현재를 통어하며 외치는 변혁의 깃발이었다. 그러나 그의 미학과 실천은 그의 죽음과 함께 멈추었다. 나규환의 등장은 그 ‘멈춤’을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새로운 엔진과 같다. 구본주가 드러냈던 ‘트릭스터의 이빨’은 그에게 고스란히 전유되었고, 그는 그 이빨로 이 현실의 부조리를 물어뜯고 있는 중이다. ‘빨간 피터의 고백’은 다시, 새롭게 이어지고 있는 것. 그의 무대는 사방팔방으로 뚫려서 전시장과 현장을 가리지 않고 펼쳐진다. 미학적 언어도 형상조각이라는 조형성의 문맥을 따를 뿐 그래피티, 개념미술, 설치미술, 미디어(영상), 퍼포먼스, 1인 시위 등 표현의 한계를 두지 않는다. 한 마디로 그는 전위적 행동주의 미술의 가장 최전선에 있는 ‘청년’ 미술가다. 10여 년 간 보여준 그의 작품들을 몇 개의 테제로 묶어본다.


#1. 동시대 형상조각 미학의 한 보루

나규환은 삶 전체가 형상조각이다. 국전(國展)의 공모 분야를 구분하기 위해 만든 ‘구상(미술)’ 개념을 비판하며 1980년대 초반에 등장한 ‘형상(미술)’은 “삶의 진실에 다가서는 새로운 미술”이었다. 당시 ‘삶의 진실’은 군부독재의 현실에 있었고, 미술가들은 그런 현실을 사는 민중의 실존을 ‘형상화’ 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났어도 노동자 민중의 삶은 여전히 비루하고 그늘지며, 밖으로 밀린다.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그런 민중을 “무리 밖으로 밀려난 무리”라고 했다. 나규환은 늘 그 무리들 속에 있었다. 날마다 삶의 진실에 다가서기 위해 몸부림이었고, 그 몸부림이 그의 형상조각을 낳았다. 2006년 평택 대추리가 미군기지 확장으로 사라질 때 ‘모판’ 든 손을 조각하며 “더 나은 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를 제목으로 달았고, 다이아몬드나 금반지가 아닌 나사 못 두 개로 만든 반지를 밥그릇에 올려놓고는 ‘결혼’이라고 달았다. 그것이 삶의 진실이기 때문이었다. <인간모독>(2009)은 쥐덫을 쌓아 올리고 그 위에 시커먼 쥐(조각) 몇 마리를 올려놓은 작품이다. 2009년은 ‘이명박’이라는 한 권력이 ‘쥐’로 풍자되던 시대였고,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미술가들에게 참으로 풍부한 미학적 상상력을 제공했었다. 조각, 오브제, 설치로 풀어낸 이 형상조각들은 그 언어의 ‘역사성’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응시하는 탁월한 형상미학의 감각을 보여준다.


#2. 부조리한 현실에 못 박는 ‘일침(一針)’의 언어

나규환의 형상조각은 ‘부조리(不條理:희망이 없는 절망적 상황)’를 ‘조리(條理)’로 바로 세우기 위한 미학적 일침과도 같다. 그의 일침은 그저 따끔한 충고나 경고에 머물지 않는다. 현실로 파고들어 뒤집고 엎는 실천이 동반된다. 2014년 세월호가 가라앉았을 때 그는 잠수복을 입고 광화문 광장에 서서 “진실을 건져라”가 쓰인 피켓을 들었다. 구본주를 위한 1인 시위에서는 머리에 붕대를 감고 “이 일은 예술가 사회적 약자 모두의 일이다”가 적힌 피켓을 들고 삼성화재 건물 앞에 섰다. 그는 그 스스로가 조각이 되어서 ‘말’의 일침을 피켓에 적고 외쳤던 것이다. <마른 하늘의 물벼락>(2012)은 둥근 철판 위에 선 두 사람을 조각한 것인데, 물벼락에 맞서는 그 인물들의 저항은 ‘페트병’으로 된 옷을 입고 하늘을 향해 입 쩍 벌리고 외치는 것이었다. 현실은 다람쥐 쳇바퀴처럼 해결의 실마리 없이 뱅뱅거리며 돌아가니, 하늘에 따질 수밖에. 두 손을 부르쥐고 말이다. 사람이 한울님이라는 동학사상은 잊혀진 바가 없다. ‘다시 개벽’의 세상은 쉼 없는 미학적 ‘일침’이 이 세상에 박혀 막힌 경혈을 뚫을 때 도래할 것이다. 그가 ‘파견미술팀’의 작가들과 함께 한 작품들은 날이 시퍼렇게 선 그런 일침의 언어였다. 생명평화의 바다와 주민들을 위한 제주 강정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을 위한 거제도 조선소에서, 박근혜 탄핵을 위한 촛불 광장에서, 용산참사 해결을 위한 거리에서, 대추리에서, 콜트 콜텍에서, 그는 그렇게 일침의 미학을 실천했다.


#3. 즉각적이고 현장적인 상상력

그의 작품들을 이해하는 데에는 불과 3초가 걸리지 않는다. 작품을 보고 제목을 살피면 그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바로 알게 된다. 그의 미술언어는 쉽고 간결하고 명확하다. 중언부언하지 않는다. 심각한 은유로 색칠하지 않아서 관객을 낯선 곳으로 몰고 가지도 않는다. 즉각적이고, 게다가 현장적이다. 이러한 그의 방식은 ‘모두를 위한 미술언어’를 궁리하기 때문이다. 공유, 감응, 감흥, 동참, 개입, 동요, 확산이라는 ‘사회적 발화’는 그가 추구하는 미학의 제1강령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이 관객의 마음을 쉽게 횡단해 버리는 따위의 ‘가벼움’으로 읽힐 수 있는 건 결코 아니다. 때때로 나는 그의 작품 앞에서 마음을 찌르는 고통으로 숨을 죽여야 했고, 갑작스레 훅 밀려오는 감정에 북받쳐서 눈물을 흘릴 때도 있었다. 반면, <귀천-나 하늘로 돌아가리라>(2013)는 흰 철재의자의 다리 하나가 철로 만든 강아지 풀 쪽으로 슬쩍 기운 개념적 설치미술인데, 존재(시인 천상병)의 부재와 그 부재의 존재가 보여 주었던 시적 상상을 탁월하게 해석해 냈다. <누명을 쓴 사람>(2010)은 잘린 나무 둥치 위에 발가락만 보이는 작품을 올렸는데, ‘억울하게 뒤집어 쓴’ 누명이라는 말의 의미를 시적으로 표현한 놀라운 작품이다. <당신이쓰다버린냉장고아래살아있습니다>(2010)는 수몰지구 마을에서 본 것으로 기억하는데, ‘수몰’과 ‘아래’라는 말이 교차하면서 마음을 마구 뒤 흔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야말로 냉장고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서 있는 인물은 수몰지구에서 산 사람들의 그림자와 다르지 않아서 물 밑으로 가라앉게 될 수많은 기억들, 삶들, 그 역사를 얼비추었다.


이렇듯, 나규환이라는 한 형상조각가의 존재는 삶의 진실을 위한 미학적 투쟁어와 동의어일지 모른다. 그것은 구본주가 보여주었던 최초의 트릭스터 이빨이기도 하다. 그 이빨의 언어로 나규환은 지금 21세기 한국사회의 부조리로 파고들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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