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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사회적 재난과 함께하는 파견 예술가-조각가 나규환

이동연 비평



내 일상의 이야기이자 시대의 이야기가 내 작품 소재이며, 한번은 현장의 작업을 모아서 보여 주고 반응을 듣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형식주의에 얽매인 비판적인 시선이 없는 건 아니지만, 멈추지 않는 나만의 작품을 하고 싶다했다.


2012년 12월 부산민주공원에서 개최한 첫 번째 전시회 <인간>을 열고 한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흔희 말하는 ‘파견예술가’ 그룹에 속한다. 서울 용산 철거민 농성장, 부산 한진중공업 파업 현장, 제주 강정마을 같은 사회적 재난의 현장에 예술행동이 필요한 사람들이 부르면 현장에 달려가는 파견예술가이다. 그는 시인 송경동, 사진작가 노순택, 정택용, 판화가 이윤엽, 문화운동가 신유아 등과 함께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굵직한 재난의 현장에서 예술활동을 해왔다. 그의 첫 개인전은 그동안 그가 파견예술가로서 현장에서 작업한 작품들을 모아 전시한 만큼 인터뷰의 내용대로 그의 일상의 이야기이자 현장의 이야기이다.




나규환 개인전 <인간>


나규환의 첫 개인전인 <인간>은 2012년 12월 22일부터 1월 20일까지 부산민주공원에서 열렸다. 이 전시회는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공사, 용산참사, 강정마을 등 사회 현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형상화했다. 전시 작품 중 '마른하늘에 물벼락'은 두 사람의 검은 형상을 폴리코트를 재료로 하여 소조로 새겨 냈다. 페트병으로 비옷도 입혔다. 시위 현장에서 물대포를 견뎌 내는 이들임을 짐작할 수 있다. 아린 고통을 고스란히 담은 얼굴 표정이 너무나 직설적이다. 나규환은 쥐덫 위를 돌아다니는 쥐들을 천장에 잔뜩 매달고는 '인간 모독'이라 했다. '낙수효과를 기대하며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과 세상'을 표현하려 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철 구조물 위에 우뚝 선 작품 '끝'은 용산 참사 당시 망루 끝에 갇힌 철거민의 고통을 표현했다. 주먹을 꽉 쥐고 폐냉장고를 뒤집어 쓴 이를 만들어 놓고는 '당신이 쓰다 버린 냉장고 아래 살아 있습니다'라고 외친다.

-『부산일보』 2013년 1월 10일자 참고-




나규환 작가는 최근에 경의선 공유지 ‘늘장’에서 공유문화 워크숍에 참여해 용접하는 법을 참가자들에게 가르쳐주었다. 경의선 공유지 ‘늘장’은 마포구 공덕동에 위치한 곳이다. 경의선 철도가 지하화하고 대신 철도가 경의선 숲길로 조성되었는데, 경의선 숲길 중 일부를 철도공사가 이랜드에 개발권을 넘기면서 그곳에 활동하던 공유문화 공동체가 사용기간 계약이 만료되어 쫒겨나갈 수밖에 없었는데, 문화예술단체들이 이를 거부하고 새로운 공유문화 터를 만들고 있다. 조각가인 나규환 작가는 이곳에 활동하는 활동가들과 시민들을 대상으로 용접에 대한 워크숍을 진행했다. 4일 동안 진행된 워크숍에 참가자가 빠지지 않고 열심히 참여하고 재미있게 워크숍을 하다 보니 늘장 식구들이 <우주용접>이라는 별명도 부쳐주었다. 나규환 작가에게 요즘 근황에 대해 물어보았다.


요즘은 주로 포천 작업실에 있습니다. 제가 대학 2학년 마치고서 갔으니까, 한 10년 좀 넘었죠. 가능하면 있으려고 하고요. 그 전까지만 해도 룰루랄라 예술 협동조합이라고, 협동조합을 만들어서 상임이사로 역할 하면서, 우리들끼리 모색을 해보자 해서 시작을 했었는데요. 그것 임기 마치고. 그게 올해 초에 끝났거든요. 임기 다 마치고, 최근에는 작업실에서 그동안 못했던 작업들 좀 해보자 이러고 있어요.

파견예술이란 무엇인가?


나규환 작가가 사회운동이나 현실참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에서 조소과를 다니다가 1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 한 후 제대할 즈음에 자신이 어떤 조각가가 되어야 하는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가 구본주 작가를 만나면서 기존에 자신이 알고 있는 조각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관점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구본주 작가는 “촌스러운 누드 조각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세련된 조각을 할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조각론을 이야기했다. 구본주 작가의 이야기는 나규환 작가가 고민하던 지점과 일치하였고, 부모님 고향과 구본주 작가가 사는 곳이 포천으로 같으면서 그 후에 자주 만났다. 나규환 작가가 예술의 사회참여에 대해 본격적으로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불행하게도 자신의 예술적 멘토이기도 했던 구본주 작가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난 이후부터이다. 당시 미술계에서 주목받던 조각가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삼성화재는 보상비를 적게 지급하기 위해 그를 작가가 아닌 일용직 노동자로 취급하였다. 이 사건은 정규직을 갖지 못한 예술가가 사회보장 제도에서 얼마나 잘 못 대우받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게 되면서 예술인들의 사회보장과 복지 권리에 대한 싸움으로 확대되었다.


구본주 작가와 거의 한동안 같이 지내다가 갑가지 그분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바로 전날까지 같이 작업하면서 지내고 있었는데요. 그 일을 겪고 나서 삼성화재랑 소송을 벌이게 돼요. 그 옆에서 그걸 같이 일들을 같이 겪게 됐죠. 그러면서 삼성화재랑 싸움이 붙었는데요. 어떻게 보면 대기업이라는 곳이 이렇게, 잘못 걸린 거죠. 어떻게 보면. 구본주이라고 하는, 굉장히 젊은 나이에 잘 나가는 조각가를 상대로, 그 사람들은 법리적 다툼을 하는 걸 옆에서 목격하고, 대책위 안에 들어가서 활동을 하면서, 횡포라고 해야 할까요? 보험사가 횡포 부리는 모습을 옆에서 보면서, 그때부터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됐죠. 다른 보험 피해자들도 많이 찾아보게 되었고요.


나규환은 구본주 작가의 교통사고 사망 사건을 계기로 대책위에 참여하면서 민중 미술계의 많은 분들을 알게 되었다. 대학교 2학년 복학했지만, 학교 성적이 안 좋아서 제적을 당했다. 그 후에 나규환은 포천에 들어가서 살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구본주 보험사 사건 이후 알게 된 분들이 저보다 더 경험 많고, 그런 쪽에 있는 선배들과 교류하면서 자연스럽게 민미협(민족미술인협회)에서 활동하고 미술운동에 자연스럽게 참여 하게 되었다. 마침 그 무렵에 미군기지로 지명된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반대 운동 싸움에 참여하면서 지금까지 사회적 재난의 현장에 달려가는 파견예술가가 되었다.


나규환은 파견예술가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작가이다. 파견미술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파견미술이라는 것은 예기치 않았던 재난이나 사건이 발생했을 때 미술가들이 그 현장에 파견되어서 예술 활동을 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파견예술은 현장예술이라는 말로 쓰이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예술 창작활동과 구분하기 위해 예술행동으로 불리기도 한다. 파견예술은 누군가가 예술가들을 파견하는 명령체계를 갖고 있지는 않다. 그것은 스스로 자신을 사회적 재난의 현장, 문화예술의 실천이 필요한 현장 파견시키고, 혹은 함께 참여하는 동료 예술가들과의 신뢰를 통해 참여를 독려한다. 파견예술은 그런 점에서 개인이 혼자하기보다는 소수 집단이 함께 움직이고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나규환 작가는 파견예술을 어떻게 정의할까?


저희들이 생각하는 ‘파견미술’은 작업실에서 우리 스스로를 파견한다는 그런 개념입니다. 커다란 어떤, 대의명분이라든가 이런 것들보다도, 작업실에서 자유를 이야기하고 평등을 이야기하고 하다보면 생기는 공허함 같은 것들이 있거든요. 재료와 치열하게 다투는 과정 속에서 생기는 그 공허함들이 현장을 가면 해소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시작하게 됐죠. 파견예술은 제일 완벽한 커뮤니티 아트인 것 같아요. 마을만들기다, 공동미술이다 해가지고 정부 기금들이 그쪽으로 많이 흘러가기도 하고요. 덕분에 자의반 타의반 프로젝트에 다양하게 참여하면서 이런저런 경험들을 해보지만, 그게 본질적으로 어떤 괴리감이 있거든요. 농사꾼들하고의 괴리감, 어디 마을 사람들하고의 괴리감 같은 것들이 항상 있는데요. 이 현장이라는 곳은 일단 그게 (괴리감) 없는 것 같아요. 그게 없고. 예술이 가능한 어떤 역할들을 거기서 확인받는 것 같아요. 예술이 치열한 싸움판에서요.


파견예술은 현장을 극적으로 바꾸고 현장의 참가자들을 예술적 표현 행위를 통해서 새로운 관점을 갖게 만든다. 파견예술은 단지 비장한 투쟁의 현장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한 수단이나, 현장을 재현하는 표현 행위가 아니라 그 자체로 현장운동의 일부이다. 예술가에게 현장은 작업실에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또 다른 작업실이며, 파견은 시간과 거리에 상관없이 그 현장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면 조건 없이 달려가는 곳이다. 미술도구가 있는 건물 안 작업실에는 혼자 있지만, 현장에는 자신과 뜻과 행동을 같이하는 동료들이 있다. 파견예술은 개인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전환시켜 집단적 행위를 배치하고, 자기 안의 작업실은 우리 안의 현장으로 전환시킨다. 나규환이 생각하는 파견예술은 현장의 역동성이 살아 있는 예술, 예술가의 존재이유를 묻게 하는 예술이다. 파견예술가들에게 현장은 자신의 고향이자 집과 같은 곳이다.


기륭 싸움 할 때였는데요. 마지막에 포크레인이 기륭 공장에 들어가서 부시려고 하는데, 송경동 시인이 포크레인을 점거해서 새벽에 전화를 한 거예요. 자기 이제 마지막이다, 새벽 2시에 전화해서 마지막이라고 하니까 뭘 어떻게 해요. 알았다고 하고, 차에 시동을 걸고 주변 선배들한테 연락을 했죠. 연락이 왔는데, 그렇다고 하더라,고 말하니까 다들 놀라가지고 간 거예요. 갔는데, 아니나 다를까 경찰들에게 둘러싸여서 포크레인에 둘러쌓여 있더라고요. 금방 내려오실 줄 알았어요. 워낙 다급하게 얘기하셔서. 하루가 가도, 이틀이 가도, 삼일이 가도 안 내려오시는데, 그때 당시에 가서 우리 뭐라도 하자하고, 뭐라도 하러 갔는데 운전하고 가면서 이런 저런 상상이 되잖아요. 이렇게 해볼까, 저렇게 해볼까, 각자 상상하던 것들이 누구랄 것도 없이, 하나씩 하나씩 덧붙여지면서 하루가 다르게 포크레인이 변화했어요. 나중에 민변 쪽 변호사분이 그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때 당시 현장 상황이 굉장히 안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포크레인이 바뀌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중에 빵 터졌다고 하더라고요. 너무 에너지를 얻은 거예요. 저희들이 꾸며놓고 포크레인이 변화되는 모습들을 보면서 어떤 기운을 받고서는 굉장히 해학적이었다는 표현을 쓰더라고요. 아, 우리가 하는 것들이 해학이라는 말이 이렇게도 쓰일 수 있구나, 라는 걸 현장에서 다시 느끼게 됐죠. 그리고 그 사람들이 같이 어떤 기운을 받고, 소통을 하고 하면서요.


파견미술이라는 개념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전에는 마술계에서는 공공미술이나 커뮤니티아트 같은 용어들이 그것을 대체하기도 했다. 파견예술은 계급과 민족의 모순을 형상화하려 했던 1980년대 전통적인 민중미술 운동과도 다른 차원에 있다. 나규환은 기존의 미술운동과 파견미술이 갖는 가장 큰 차이는 작업실에 대한 생각에 있다고 한다. 어떤 개념미술이라든가, 미술행동에 치우치다보면 개념적인 접근을 하고, 시각예술적인 부분들을 놓치게 되는 경우들이 생긴다. 미술의 재현행위들을 개념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규환의 경우에는 나무 깎고, 쇠 두드리고, 흙 주무르고 하는 그런 행위에서 매력을 느끼고 그런 작업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파견미술에서 작업실의 개념을 현장으로 확대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작업실 공간하고 현장이라는 공간을 분리하지 않고 넘나들고, 심지어는 그 차이를 크게 느끼지 않고 창작활동을 하는 그 행위에서 차별점이 발생한다. 공공미술의 경우에는 그것도 어떻게 보면 국가나 지방자치 단체로부터 공공지원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상업적인 부분하고 맞닿아있어 파견미술과는 거리가 있다. 파견미술이라는 건 예기치 않았던 재난이나 사건이 발생했을 때 미술가들이 그 현장에 파견되어서 활동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한때는 공공미술의 커뮤니티 아트 이런 것들이 유행하면서 마을에 벽화를 그린다거나 조형물 같은 것들을 만들었는데 그것 역시 공공의 요청에 의해 미술가가 파견되었다는 점에서 유사할 수 있지만, 사회적 재난의 현장에 달려가는 파견미술은 그 참여의 목적부터가 다르다. 파견미술을 통해서 제작한 조형물들은 공공미술의 차원에서 만든 환경조형물과는 다른 목적을 가진다. 공공미술에서 환경조형물은 미술조형물이 미술관에서만 있지 말고 공공공간에서 대중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파견미술과 유사할 수는 있어도, 파견미술처럼 특정한 사회적 재난의 행위에 개입하지는 않는다. 거꾸로 파견미술 작품들은 공공재원으로 제작되어 공공공간에 하나의 감상용 작품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사회적 사건들에 개입하고, 그 사건들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한다. 나규환은 파견미술은 특정한 조형물을 현장에서 제작하는 과정을 통해, 미술의 사회적 실천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리고 제작된 조형물이 사회적 사건 안에서 의미를 생산하는 과정을 통해서 작품의 진정성이 살아 난다고 말한다. “현장에 그게 들어섰을 때는, 포크레인 같은 게 들어섰을 때는, 다들 그 상황을 숙지하고 있고, 그게 무엇을 얘기하고 있고, 무슨 변화를 의미하고 있는지 우리가 설명하지 않아도 본인들이 먼저 거기에 대한 해석들을 내놓으니까. 어떻게 보면 현장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저희들이 도리어 배우는 입장이 됩니다.” 작업실과 현장이 모두 작가들의 창작공간이지만, 대추리에서 강정마을, 밀양, 세월호 재난의 현장에 이르기까지 현장은 방안에 갇혀 있는 작업실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느낌이 많이 다르죠. 일단, 현장은 뭐가 없어요. 당황스럽기도 하고, 거기가 작업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제약 조건도 많고. 늘 변수들이 있어요. 결국은 순발력인데. 그런 순발력도 혼자서는 그렇게 생각을 하거든요. 작업실에서의 어떤 내공이 쌓이지 않으면, 그런 순발력도 힘들다. 용산에서 미술행동을 하는데, 우리들이 하면서도 내심 저희들끼리 그런 얘기들을 해요. 저 전경들 무리 속에서도 미대생이 있을 거야. 보고 있을 거야. 쟤네들도 무슨 그림인지 보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적어도, 그런 것들에 대한 인식을 하는 거죠. 그런 고민들이 잘 그린다, 라고 하는 그런 전통적인 회화의 맛이라든가, 조각적인 맛에 대해서 어떻게 보면 집착을 하고 있는 거죠. 시각예술 쪽에서.


피견예술가가 처음 달려간 곳-대추리


그래서 나규환 작가 현장에서 참여했던 파견예술의 장소들을 구체적으로 물어보기로 했다. 나규환은 대추리 미군기지 건설 반대 운동부터 지금까지 거의 모든 사회적 재난의 현장에서 활동했다. 그가 참여한 곳은 평택 대추리에서 시작해서 서울 용산, 제주도 강정마을로 이어진다. 파견의 현장에는 대우 비정규직 투쟁도 있었고, 기륭전자, 그리고 세월호도 있다. 그가 파견 예술 현장으로 처음 갔던 평택 대추리는 2006년 미군기지 건설 반대 운동이 한창이었다. 가수 정태춘의 고향이기도 한 대추리 투쟁 현장에 지역 및 반전운동가 뿐 아니라 예술가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그 참여의 정도와 수준은 사회운동의 예술적 실천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을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대추리 미군기지 반대 예술행동은 2000년대 수많은 예술행동의 시발점이었다.


대추리 파견 예술행동


대추리 현장 예술 활동은 2006년 사회적 쟁점이었던 평택 미군기지 이전 문제를 둘러싸고 자행된 지배권력의 폭력에 맞선 사회적 저항이자 비폭력 평화운동이었다. 또한 대추리 현장 예술 활동은 대추리 주민들의 불복종 운동과 함께한 공공예술이자 커뮤니티 아트였으며 평화로운 마을을 만들기 위한 문화기획이자 대지예술이었다. 대추리 현장 예술 활동은 무엇보다도 국가 폭력에 맞서는 직접 행동이 다양한 예술을 통해 표출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매우 다양한 장르와 형식의 예술가 집단이 대추리하는 장소를 거점화하며 공동작업을 실천했다는 점에서 매우 놀라운 사건이었다. 민중예술, 대중문화, 비주류문화, 실험예술 등 다양한 예술 형식들이 미술, 음악, 영상, 사진, 문학, 연극 등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통섭적인 예술행동을 구현하였다. 대추리 현장 예술 활동을 계기로 사회운동의 영역에서 장소 거점형 예술행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고, 사회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예술행동 커뮤니티이자 작업 공동체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이원재, 「예술행동을 둘러 싼 사회적 연대와 실천」, 『좌파가 미래를 설계하는 방법』, 문화과학사, 2016).




나규환 작가가 대추리 현장을 알게된 것은 고인이 된 구본주 작가가 계기가 되어 민미협에 참여하면서부타이다. 대추리 투쟁에 민미협 회원들이 참여하면서 파견 현장을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현장에 있던 모판을 가지고 주민들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나중에 초상화를 모아서 농협 창고에서 전시를 했었는데, 나규환은 조각가이기 때문에 나무를 깎아서 대추리 상황을 표현했다고 한다. 전시회가 끝나고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은 돌려주지 않았는데, 자신 작품만 돌려주었다고 한다. 이유는 모판에 초상화를 그린 것과는 달리 자신은 모판을 가지고 조각한 작품이어서 작가의 고유한 작품의 성격이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판 작품을 시작으로 나규환은 대추리에서 다양한 현장 예술작업을 했고, 나중에 대추리 역사관이 꾸며질 때에 작품설치 기획에 동참하였다. 대추리 현장에서 최병수, 이윤엽 작가들과도 함께 작업했는데, 보관된 작품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파견예술 작품들은 보관하지 않고 현장에서의 역할이 끝나면 소각하거나해서 없애버리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조각가이자, 설치작가로서 현장에서 만들었던 작품들이 훼손되거나 철거가 되거나 하는 상황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그것은 운명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공간과 운명을 같이하는 것이 파견예술의 미덕이라는 것이다. 대추리 투쟁이 주한 미군기지 이전이라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싸움이어서 안보나 분단문제와 연결될 수밖에 없고 당시로서도 금기시 되던 파견미술 행동이었다. 대추리에서 작업한 기간 중에 공권력과 싸우면서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당시에 대추 분교 초등학교 유리창에 마을 주민들 초상화 작업을 기획해서 여러 작가들이 그런 작업을 쭉 했어요. 보통 초등학교에 동상들이 많잖아요. 이승복 기념 동상도 이나 세종대왕상 같은 거요. 그 분교에도 이승복 동상이 있었어요. 작가들이 거기에다 색깔을 칠해놨더라고요. 하늘색도 칠해놓고요. 그런데 함께 참여한 정명수 선생님이 구본주 작가의 ‘갑오농민전쟁’ 작품을 거기에 갖다 두시겠다고 제안을 하셔가지고, 그 작품이 대추분교 앞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 작품을 세우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공구리를 직접 쳐주셨어요. 좌대요. 시멘트 부어서 그 위에 하는데요. 근데 정명수 선생님 동생분이 미술 전공자가 아니세요. 대추리에 가서 공구리를 어떻게 할까 얘기들을 서로 주고 받는데, 동생 분께서 한참 듣고 있더니 공구리는 어디야? 이러더라고요. (웃음) 대추리 근처에 동네 이름들이 객사리 이런 것 있고 그러잖아요. 공구리는 어디야? 이래서 아, 일반 사람들은 모를 수 있겠다, 싶어서 빵 터졌는데요. 어쨌든 마을 주민들이 공구리를 쳐주시고 해서, 이 신부님이 감사하다는 인사를 해주셨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해주시고, 마을 분들에게 설명도 해주시고, 고사도 지내고 했는데요. 행정대집행이 일어나면서 다 부서지잖아요. 학교도 다 부서졌죠. 이승복 동상도 다 부서졌거든데, 유독 갑오농민전쟁 상은 경찰들이 하나도 안 건드렸더라고요. 아마도 그걸 건드리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나봅니다. 일단 비싸 보이니까. 나중에 문제가 생길까봐 안 건드렸다고 하더라고요. 그 부서진 잔해 속에 갑오농민전쟁상이 있었고, 작가들이 현장에서 그 뒤에 깃발을 꽂았습니다. 평화라는 깃발을 꽂고, 그걸 사진작가 분들이 사진을 찍었어요. 어떻게 보면, 상징적이다 라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조형물로서도 그렇지만, 조형물이 단순히 조형물로서도 아니고, 소련 붕괴 될 때도, 동상 가지고 시비 걸잖아요. 동상부터 끌어내리고 하잖아요. 그런 것 보면, 감정들이나 상징성들이 거기 다 녹아져 있나보다, 사람들도 안 건드리고 남아 있는 모습들을 보면서, 어떤 에너지들을 또 받았을 것 같아요.


참사의 현장을 예술의 장으로-용산참사 예술행동


이제 파견예술 행동의 장소를 용산으로 옮겨 물어보았다. 나규환은 용산 참사가 터진 이후 계속해서 방송을 예의주시하다가 이틀 후에 현장으로 바로 갔다고 한다. 이미 현장에는 작가들이 많이 있었고 특별하게 약속한 것도 아닌데 매주 현장에 가서 뭔가를 해보자고 결의했다, 당시 민미협 사무국장이었던 나규환은 후배 작가들과 함께 근 1년간을 실시간 라이브로 현장의 상황을 다른 예술가들 시민들과 공유했다. 선후배들과 다양한 단위들하고 연대하면서, <끝나지 않는 전시>라는 전시를 기획했다. 남일당 건물 뒤쪽에 유가족 분이 운영하시던 ‘레아’라고 하는 호프집이 있는데, 주인이 그 공간을 예술가들에게 내주었다고 한다. 작가들은 그 공간을 ‘레아미술관’ 이라고 이름 짓고, 거기서 <끝나지 않는 전시>를 계속 했다. 그곳에서 1-2주 단위로 작가들이 돌아가면서 다양한 파견예술 활동을 했다고 한다. 참여한 작가들 중에는 동화책 작가들도 있고, 2층의 경우에는 방송국 활동을 하시는 분, 음악하시는 분들이 참여했다. 파견미술가 그룹은 포장마차 운영할 때 나오는 잔해들 모아가지고, 예술포차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스토리가 있는 공간으로 꾸몄다. 한동안 그걸 포장마차를 가지고 지방에 무슨 순회전시회를 할 것이 있으면, 그걸 가지고 내려가서 용산 참사를 세상에 알리는 활동을 하고 다녔다. 용산 참사 현장에서의 파견예술 활동은 대추리 이후 가장 활발하고 적극적이었다.


근 1년 간 계속 되었던 일이기 때문에, 거의 기간으로만 따지면, 거의 저희들이 매주 가서 작업들을 진행했기 때문에요. 작업량도 그것과 관련된 것도 많고요. 우연치 않은 기회에,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되게 깊숙이 관여를 해있었던 것 같습니다. 현장에 있었던 유가족 분들이나 이런 분들하고 되게 깊숙이 관여되어 있었던 것 같고요. 그걸 관여 한다고 해서 관여가 되는 것도 아니고, 다 맞아야 하는 건데요. 그때는 어떻게 다 맞았던 것 같아요. 다행히도 저희들이 감투를 쓰고 있어서 조직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여지들도 있었고요.


파견예술은 재난의 현장에서 즉흥적이고 신속하게 그 상황의 심각함과 사건의 본질을 공감하게 만드는 예술행동이다. 그런데 무고한 시민들의 죽음이 발생한 곳에는 추모와 애도의 분위기가 지배한다. 용산 참사의 경우에는 경찰의 과잉진압에 의해서 희생자들이 발생하는 것이고, 아직도 가해자와 피해자의 진실을 밝히는 진상조사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예술행동이 자칫 사치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예술행동이 재난을 고발하고, 재난의 아픔을 치유하는 감성적 공감대를 만들 수 있지만, 법적, 제도적 해결을 직접적으로 이끌어 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혹 재난의 현장에 참여한 예술가들은 자신의 재현행위에 대해 매우 조심스럽게 하는 경우가 있고, 피해의 감정이 강한 상태에서는 피해 당사자들이 예술의 재현 행위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갖는 경우도 있다. 파견예술가들이 예술이 애도의 숙연한 감정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부담감들을 항상 갖고 있다.


그러나 나규환은 그런 부담감 같은 것을 현장에서 느낀 경우는 없었다고 한다. 자신은 조각가이고, 대학 수업 때 조각가는 ‘살아 있게 하는 자’ 라는 뜻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했다고 한다. “누군가를 추모하고, 그런 것들을 기억하고, 어떻게 보면 예술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결국은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고 그런 것들이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희생자들을 예술을 통해 어떻게 잘 모실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유가족들에게 어떻게 위로할까하는 더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더 낫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이런 고민들을 현장에서 많이 하면서 그 애도와 위로의 형태를 어떤 식으로 하면 좋을지를 더 고민했다고 한다.

파견예술의 장-환경에서 노동까지


강정마을에서의 파견예술은 처음에는 관련 정보를 모르다가 함께 활동하는 동료들을 통해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나규환은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미군기지와 가까운 곳에서 자라고 생활하고 있다. 어릴 적 살았던 원주에도 미군기지가 있었는데, 미군들을 따라다니면서 초콜릿 달라고 하면서 역 앞에서 따라다니고 놀았다고 한다. 지금 살고 있는 포천도 매일 헬리곱터가 수시로 날아다닌다고 한다. 서울로 나가려면 의정부를 거쳐야 하는데, 가는 길에 미군 2사단을 지나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 2사단이 평택으로 이전했고, 지금 2사단은 행정복합도시로 바뀌었다. 그런 점에서 나규환에게 군사와 안보를 주민들에게 강제하는 강정마을 문제는 그냥 지나칠 문제가 아니다. 평소에 평화와 군사문화에 관심을 더 많이 가지게 된 것도 어릴 적 환경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냥 제가 강정 마을 사건들을 바라보는 시점들은, 평화를 지키려고 무기를 사는 사람들하고 평화를 지키겠다고 무기를 없애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거든요. 평화를 지키려고 무기를 산다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거죠. 그 지점에서 동의가 안 되고, 결국 궁극적으로는 그 자체가 가치가 시간이 걸리더라도 변화해 가야 한다고 생각을 하면서 접근을 하게 된 거거든요. 지금도 계속 진행중인 거고, 마을 공동체가 완전히 다 파탄날 정도로 다 망가졌거든요. 되게 치사하거든요. 공동체를 파괴하는 방법도 그렇고, 마을 이간질시키고 날인 받는 과정부터 해서 벌금 때리고, 도로 낸다고 하고 그런 일련의 과정들이 납득이 안 되죠.


나규환은 다른 파견예술가와 함께 강정마을에서도 다양한 예술활동을 하였다. 가장 먼저 한 것은 폭파되기 전에 구럼비 바위의 탁본을 뜨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구럼비 바위는 탁본으로는 불가능하고 대신 탈을 뜨듯이 캐스팅을 떴다. 바위들을 네 덩어리 정도로 해서 캐스팅을 뜨고, 거기에 채색을 해서 탈 인형 같은 걸 만들었다. 그리고 자동차 꾸미는 작업도 했다. 마을에서 쓰는 1톤 트럭을 개조해서 ‘피스포터’ 라는 이름으로 설치물을 만들었다. 원형이 트럭이긴 하지만 거북선처럼 꾸며서 마을 분들이 시내에 연설하러 나간다거나 시민들에게 발언하러 나갈 때, 그 차 끌고 나가서 그 위에서 연설하도록 꾸몄다. 또 강정마을 투쟁을 위해 전국에서 활동가들이 왔는데, 이들이 머무는 컨테이너에 벽화를 그리기도 하고, 장승을 깎기도 했다.


용산 참사나 강정마을은 주로 도시개발과 군사주의, 환경생태의 문제라면 그가 파견예술가로 참여한 기륭 전자나 GM대우의 경우에는 노동과 관련된 것이다. 기륭과 GM대우 같은 노동분쟁 투쟁들은 장소가 안정되어 있다기보다 왔다갔다 움직여야 하는 가변적인 싸움을 해야 한다. 물론 노동자들이 일하는 공장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 해고노동자들이기 때문에 주로 싸움의 장소들은 농성을 벌이는 장소이다. 기륭이나 대우에서 파견 예술을 하면서 다른 곳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는 그때그때마다 매번 달랐다고 대답했다. GM 대우의 경우 농성하신 분들의 요구가 천막 농성을 하고 있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혐오시설로 보고 자신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이지 않도록 농성천막을 예쁘게 꾸며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천막을 멋지게 꾸미는 미술작업도 했다. 기륭전자의 경우 농성을 하고 있는 포크레인에서의 작업도 있었다. 파견예술은 공장 앞에서 주로 이루어지는 작업이었다. 이런 일들 외에 비정규직 <기금 마련전>이라고 해서 전시를 기획해서 전시를 진행하기도 하, <천막 미술관>이라고 해서 천막을 치고, 합판도 치고 해가지고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전시장을 만들었다. 노동 분쟁은 대부분 노동조합원들의 농성장을 잘 활용해서 파견예술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주로 농성하시는 분들을 위한 작업이 많다고 볼 수 있다.


나규환 작가 역시 한진중공업 사태에 희망버스 활동을 했다. 특히 한진중공업은 배를 만드는 곳이기 때문에 해고 노동자들과 용접 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고 한다. 노동자들과 만나고, 밥 먹고 하다가 거기가 배 만드는 곳이라는 걸 전혀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가 나중에 자신이 조각가라고 소개하자 농성에 참가한 노동자들이 용접도 잘 하겠다고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현장에서 작업할 때 농성자들에게 부탁해 철도 갖다 쓰기도 하면서 현장의 장소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현장에 장소가 가진 요구들에 맞게 그때그때마다 순발력 있게 작업한 것들은 현장에 대한 자연스러운 인지와 현장 안으로 예술이 녹아들어가는 과정이다.


가만히 생각하니까, 배 만드시는 거면 용접들을 다들 하시지 않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까 다들 선수이신 거예요. 20년, 30년 하고, 배 만드는 용접은 다르거든요. 레이저 쏴가면서, 기포 하나라도 나오면 안 되니까. 우리들이 하는 용접하고 다르니까. 그분들, 얼레둘레 해가지고 가서 85호 크레인 앞에 갔는데요. 크레인이 워낙 크니까 써 있지도 않아요. 그래서 뭐라도 해야겠다 해서 85라는 숫자를 고철들 가지고, 이렇게 해서 간판처럼 붙였죠. 그때 노동자 분들이 용접기하고 필요한 철들 구해주시고 해서.


삶에 대한 성찰의 장소- 세월호 파견예술


마지막으로 세월호 현장 파견예술에 대해 질문을 하였다. 다른 장소와 달리 나규환 작가는 세월호에 대한 질문을 할 때 삶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였다. 팽목항에서 세월호 유가족 농성현장에서 그는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떻게 살아야 하나하는 고민을 계속 하고 있다. 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 나규환 작가는 제주도에 있었다고 한다.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룰루랄라 협동조합이 한 달간 제주 올레에서 살기로 하고, 한달간 민박집에 머물면서 일종의 커뮤니티 아트 작업을 하고 있는 중에 세월호 사건이 난 것이다.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결국 그 작업은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갔다고 한다. 단식 농성하는 광화문 장소에서 흙 작업을 되게 크게 했다. 한 달 간 작업을 해서 광화문 쪽에다 조형물을 룰루랄라 협동조합 작가들하고 설치하고, 전시를 기획해서 꾸렸어요. 마포구 일대랑 광화문 쪽하고 작업하고 문화연대가 기획한 <세월호 연장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세월호 역시 장소가 중요하다. 배가 침몰된 곳, 그곳과 가장 가까운 팽목항, 그리고 유가족들이 농성을 하고 있는 광화문, 단원고등학교 교실이 있는 안산, 세월호 재난의 장소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세월호 재난이 벌어지고 싸우고 있는 장소들은 우리 사회 재난의 장소의 축소판 같아 보인다. 그 장소에는 안전, 교육, 권력, 정치, 혐오와 이데올로기의 전쟁터들이다. 세월호 사건을 지켜보면서 나규환은 나라가 뒤집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그냥, 흘러 넘기기에는 너무 말도 안되는 국가의 시스템들. 특히 최근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또 터지면서 개인의 삶을 힘들게 만드는 사건들이 연속해서 터지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 다음 또 터질 거고 계속 그런 느낌인 거예요. 이게 해결이 안되면. 구조적인 걸 바로 잡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돼요.” 그래서 그는 세월호 사건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하는 문제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총체적 비극을 안겨다 준 세월호 사건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 질 게 뻔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면서 삶의 망각과 비열감 같은 것을 강하게 느낀다. 특히 세월호 유가족들이 단식하는 농성장소에서 폭식투쟁을 하는 일베 회원들과 자녀들의 대학입시 문제로 희생자들이 있는 교실을 이전할 것을 주장하는 학부모들을 목도하면서 삶의 문제를 더욱더 강하게 느끼게 된 것이다.


일베들의 폭식투쟁을 뉴스로 접하고 나니까 나중에 어버이연합 같은 극우 단체들이 전경련에 지원을 받는 것으로 드러난 것까지 포함해서, 제 느낌은 이게 그냥 나라의 축소판 같다는 겁니다. 단원고 학부모 반발도 사실 마찬가지죠. 피해자 가족들하고 재학생 학부모들하고 갈등을 겪고 하는 걸 더 많이 보게 되거든요. 내가 운이 좋아서 거기에서 살아남고 했더라도, 내가 재학생 학부모라면, 아이 대학을 가기 위해서 그런 어떤 일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저는 사실 잘 이해가 안 가거든요. 재학생 학부모들의 입장들을 교육이라는 게 교육문제를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는 지점들이 막 생기기도 하고요. 저렇게 해서 대학을 가서 뭘 하더라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들고요. 어떤 구조적인 시스템을 계속 보게 되더라고요. 그걸 만들어낸 사람들. 우리 이렇게 살고 있는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고민을 계속 하게 됩니다.


나는 마이너리티 아티스트인가


한국 사회 거의 모든 사회적 재난 사건에 파견미술가로 참여한 나규환 작가는 마이너리티 작가일까? 그가 예술을 바라보는 태도, 작업하고 있는 장소, 삶의 태도와 생계를 꾸려나가는 상황들을 전체적으로 고려해보면 그는 분명 소수자로서의 예술가, 즉 마이너리티 아티스트가 분명하다. 학연과 지연이 지배하는 주류 화랑계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설사 그 안으로 들어간다 해도 작가로서의 자유로운 창작환경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힘든 것은 마찬가지이다. 차라리 주류 화랑계에 기를 쓰고 들어가서 고생할 바에야 다른 활동에 대한 방식을 모색하는 것이 훨씬 건강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어차피 작가들의 8할, 9할은 다 무명라면, 중요한 것은 그걸 어느 쪽에 방점을 찍고서 자기가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느냐하는 것이다. 자신이 파견미술 활동을 하거나 룰루랄라 협동조합을 하고 있는 것도 다른 방향에 대한 모색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작가로서 대중들과 어떻게 소통을 해나갈지에 대한 고민도 많고, 그래서 룰루랄라 협동조합을 만들었지만, 주로 작가들만 있다 보니 기획자와 이론가들이 제공해주는 담론이 부족해 한계를 느끼고 있다. 조합원인 70여명이 되는 룰루랄라 협동조합은 주로 성미산 마을 축제 때 아트마켓을 진행하고, 충북 영동의 폐교를 재생해서 만든 <자계 예술촌>이라는 창작촌에서 예술농장이라는 것을 운영해서 흙과 나무를 소재로 다양한 교육사업과 창작물을 만드는 일을 계획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적자로 운영된다고 한다. 돈을 벌어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마이너리티 아티스트들에게는 이 일이 가장 고민되는 부분이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작품을 팔고 아트마켓이 참여하여 생계를 유지하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그래서 나규환 작가는 가급적 적게 쓰고 생활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냥 안 써요. 쓸 일이 없어요. 쓸 일이 없고. 일단 소비가 적어요. 지출을 최대한 줄이고, 이 생활도 오래 해서 그런지 되게 무감각해지는 것 같아요. 경제 개념 자체가 현실하고 굉장히 동떨어져 있어요. 내가 만원 쓰고, 십 만원 쓰는 것 하고, 사람들이 만원 쓰고 십 만원 쓰는 그 갭이 상당한 것 같아요. 기륭 전자 하면서도 그 분들 만나서 얘기를 하는데요. 비정규직 하면서 80만원 받는다, 100만원 받는다, 이런 얘기를 하는데요. 저희들끼리 순간적으로 ‘괜찮은데’ 했다가, 아저씨들 얘기를 들으면서도 80만원이면 괜찮지 않나, 이런 얘기들을 저희들끼리 얘기를 나누는데 이거 가지고 안 되잖아요. 경제적인 걸 얘기하다보면, 작가들의 경제개념하고 사회적인 개념하고 굉장히 많이 동떨어져 있는 거예요. 통계 나온 걸 보면서도, 100대 기업 임금 노동자들 평균 소득이 400만원이래요. 그래서 제가 직접 만나서 물어봐요. 일반 사회 생활하는 친구들 만나서요. 그 정도 한다고 하더라고요. 심지어 제 나이 또래 되는 대기업 다니는 친구는 거의 700도 받는다고 하고요. 그 정도 벌면서 돈이 없지는 않는 것 아니냐 했는데요. 그런데도 돈이 없대요.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거예요. 그런 개념 자체가. 80만원 벌어도 돈이 없다고 하지. 700만원 벌어도 돈이 없다고 하지. 아니,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그 돈을 대체 어떻게 쓰는 거야? 얘기 들어보면, 돈 버니까 다른 가정생활을 제대로 못하는 거예요. 고용을 한대요. 집안 돌보는 사람들이나. 120-150 정도 그 분들 주고. 애들 학원 보내면 80 깨지고, 그런 식으로 하고 나간다고 해요. 집 마련하기 위해 돈을 모으기도 하고. 얘기 들으면서 드는 생각이 700만원 버는 사람은 700만원에 맞게 쓰면서 살고, 80만원 버는 사람들은 80만원에 맞게 쓰면서 사는데, 이 갭이 너무 심한 거예요. 그 현실감을 찾는 데도 사실 최근 일이예요. 120만원만 얘기 들어도 괜찮은데, 라는 생각을 버린 게 최근 생각이에요. 생계비라는 것이 많다 적다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한편으로 들면서요. 힘들죠.


나규환 작가 역시 넉넉한 편에 있는 작가가 아니다. 자신의 집을 가지고 있느니 아주 가난한 작가라고 볼 수 없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집을 살 때 빌린 대출금을 꼬박꼬박 값아야 하는 신세다. 일정한 수입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계활동 역시 불안정하다. 창작지원 준비금을 예술인 복지재단에 지원하려면 자신보다도 더 열악한 상황이 되어야 하고, 공공문화재단에 프로젝트를 신청해도 자신의 활동 경력으로 인해 선정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래도 그는 생계의 어려움에 대해 크게 염려하지는 않는다.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 노동과 파견예술 현장에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노동이라는 게 사실 분리될 수 없는 문제이지만, 파견예술가로서 활동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분리될 수밖에 없다. 하기 싫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 알바를 해야 하고. 그런 부분에 대한 갈등은 여전히 존재한다.


나규환 작가는 돈을 버는 노동과 예술행동을 하는 노동의 분리를 해소하는 방법으로 특별한 기획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는 야구를 좋아하는데. 어느 날 우연하게 알바천국에서 알바를 할 수 있는 곳이 없나 검색하다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 야구장에서 기록원을 구하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직장인 야구도 기록원이 필요해서 알바가 생긴 것이다. 평소 야구도 좋아하고 해서, 기록원 알바를 했는데, 그때 거의 하루 12-14시간 씩 야구를 기록하다보니, 주말을 끼고 한 4일 정도를 압축해서 일을 해도 돈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기록원 일을 한 2년 정도 하면서 그는 아주 흥미로운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해다.


사회인 야구만화를 그릴까 구상중입니다. 그걸 한 게 벌써 4년 전인데요. 그걸 하면서 그때 당시도 고민을 했었어요. 너무 아까운 거예요. 야구 자체도 그렇지만 이걸 어떻게 잘 엮으면 제 삶하고 같이 붙어가지고 얘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아무튼 그런 것 같아요. 러시아 대문호인 도스토예프스키도 도박으로 평생을 망쳤지만, 어쨌든 그것 때문에 대작을 남겼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이 상황을 저는 근거 없이 믿고 있어요. 어떤 상황들에 대해서, 그게 하나의 돈벌이가 아니라, 거기에도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을 통해서 다른 것들을 할 수 있는 그런. 그래서 그런지 일상적인 어떤 코드가 딱 꽂힌 것처럼.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그는 삶의 태도와 작업의 관점, 생계에 대한 소신 등에 있어 파견예술가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매우 만족해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장소와 사건 시간에 관계없이 파견예술에서 변하지 않는 게 무엇이 있는지 질문을 해보았다. 그는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제가 예술을 하는 어떤, 결국 삶에 대한 고민인 것 같아요. 삶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현장으로 갔던 거고요. 나는 어떻게 살 건가?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계속 보고 있고, 그런 것들을 다른 언어로 다른 식의 방식으로 진부하지 않게 어떻게 설득시켜 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고요. 여전히 계속 유효한 고민들인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는 내가 무슨 알바를 하고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하든, 되게 둔감한 것 같거든요. 유연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그래서 다른 분들하고 그런 부분에서 차이가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그냥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떤 현장이다 작업실이다 라는 것을 떠나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라는 고민을 하는 건 똑같은 것 같아요.


p.s. 나규환 작가에게 함께 파견예술을 하는 동료들, 가령 송경동, 이윤엽, 노순택, 정택용 이런 분들하고 굉장히 친한 사이이시고, 하나의 파견예술가 그룹으로서 커뮤니티를 이루고 계시는데요. 그분들에 대한 개별적인 평가를 할 필요는 없겠지만, 같이 현장에서 있으면서 가졌던 예술가로서의 공동체 의식 이런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지를 물어보았다. 이 동료들은 어떤 다른 예술운동조직이나 커뮤니티 그룹들보다 끈끈한 연대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대답에서 예술과 삶에 대한 그의 솔직하고 진솔한 태도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분들은일단 용감하시죠. 저는 겁이 많거든요. 만사에 다 겁이 많아요. 겁이 많다는 게, 어떻게 보면, 이렇게 보면서 왜 학교에서 모범생 있잖아요. 소위 얘기하는. 저는 그런 쪽에 가까웠던 사람이었거든요. 이 한 나라가 만들어지고, 유지되고 굴러가는 식의 어떤 것들을 보면서도 나는 이게 그냥 불변하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들이 있었어요. 그렇게 하면 그렇게 가는 것, 저렇게 하면 저렇게 가는 건지 알았지. 같이 활동하는 작가들을 보면서 그게 아니다, 그게 아니고, 이건 우리가 같이 소통하면서 얼마든지 바꿔낼 수 있는 영역인 거다, 이 사회는 만들어진 틀 안에서 박혀서 사는 게 아니고, 우리가 만들어 가면서 같이 굴러가면서 살 수 있는 거다, 힘이 있든, 힘이 없든, 권력이 있든, 권력이 없든, 다양한 단위에서 연대하면서 얼마든지 그런 것들을 바꿔 낼 수 있다는 것을 그런 걸 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을 보면서 마찬가지로, 어떤 사회적인 것을 떠나서 저희들끼리 만나면 작업 얘기하거든요. 재료 어떻게 썼냐. 시각적으로 어떻게 표현하냐. 이런 식의 얘기들을 하는데요. 사실은 그런 고민들이 어떻게 보면 저희들이 지난 선배 세대들하고의 또 다른 차별점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한 선생님이 그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제가 결혼할 즈음에. 결혼한다고 하니까 그런 얘기를 하신 것 같은데요. 자기 때에는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고 눈치만 보느라 끝난 것 같대요. 그런데 기환이 너는 너 하고 싶은 것 다 하라고. 그래도 되는 시대인 것 같다고. 내키는 것 하고 싶은 것 다하라고 그런 얘기를 해주시더라고요. 꽤 오래전에 들은 얘기인데도 어느 시점에서 그렇게 살아야지, 라는 생각이 들어요. 결국은 사람들도, 한 국가도, 한 개인에 이런 것들이 얽매일 게 아니고, 그런 것들이 존중되어지는 쪽으로 자꾸 가야 되지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 국가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그런 식으로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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